
시민행정신문 강갑수 기자 | 광주 동구는 무등산국립공원 일원을 자연·역사·예술·차(茶) 문화가 어우러진 ‘체류형 예술관광지’로 재탄생시키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나선다고 밝혔다.
동구는 문화체육관광부 ‘남부권 광역관광개발계획’에 포함된 국비 지원 사업인 ‘예술접목 야행관광 공간조성 사업’을 통해 의재 허백련 선생 의 문화예술정신과 무등산 고유의 차 문화인 ‘춘설차’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무등산권을 한국형 인문·예술관광의 대표 거점으로 육성한다는 구상이다.
이번 사업은 단순한 경관 정비를 넘어, 자연 속에서 낮과 밤을 아우르는 예술·차 체험이 가능한 체류형 관광 모델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연과 예술이 만난 산, 무등산
무등산은 자연과 더불어 사유와 실천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온 인문학적 장소이다.
특히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7) 화백은 근현대 남종화의 거장으로, 무등산 자락에 터를 잡고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실천한 예술가다.
그에게 무등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창작과 사유, 교육과 일상이 한데 어우러진 ‘실천의 공간’이었으며, 오늘날의 의재문화 유적지는 이러한 예술관이 고스란히 담긴 상징적 장소로 평가된다.
무등산은 의재 허백련이 활동하기 이전부터 지식인, 종교인들이 자연 속에서 사유하고 교류했던 인문학적 공간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2·8 독립운동에 참여한 석아 최원순은 격동의 시대 현실을 성찰하는 지식인의 시선으로 무등산과 마주했고, 오방 최흥종 목사는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실천을 바탕으로 자연 속 수양과 사색의 시간을 이어갔다.
이처럼 다양한 인문 자산이 공존해 온 무등산은, 의재문화유적지를 통해 개인의 예술을 넘어 지역이 축적해 온 인문학적 가치와 공간적 의미를 보여준다.
동구는 그동안 ‘무등산 인문축제’를 비롯해 일상 속 인문 자산을 시민의 삶과 관광으로 연결하는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특히 3년간 이어진 ‘무등산 인문축제’는 무등산의 역사·문화·자연을 함께 나누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며, 일회성 행사를 넘어 축적 가능한 인문·예술 콘텐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번 사업은 이러한 인문도시 정책의 연장선에서, 무등산이 품고 있는 자연·예술·문화의 가치를 공간 기반의 체류형 예술관광 콘텐츠로 구현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다.
●1,200년을 이어온 차 문화, 춘설차의 재발견
무등산 ‘춘설차’는 이른 봄 눈이 채 녹기 전 채엽한 찻잎으로 우려낸 전통 차로, 은은한 향과 깊은 맛으로 예로부터 귀하게 여겨져 왔다.
일교차가 크고 안개가 잦은 무등산 자락은 차 재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년대) 증심사 창건 당시 스님들이 심은 야생차에서 이 일대 차밭이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우리나라 차 재배 역사에서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로 평가되는 공간이다.
의재 허백련에게 차는 단순한 기호식품을 넘어 예술적 사유와 수양의 매개였다.
그는 차를 마시며 그림을 그리고 제자들과 교류하며 예술 세계를 확장했고, 자연 속에서 차와 예술을 함께 향유하는 이러한 태도는 춘설차밭을 단순한 생산지가 아닌 삶·예술·사유가 어우러진 문화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커피 문화 확산과 전통 차밭 관리의 어려움 등으로 춘설차 밭은 점차 사라졌고, 무등산의 차 문화 역시 희미해져 가고 있다.
동구는 이번 사업을 통해 사라져 가던 춘설차 밭을 단순 복원을 넘어 ‘현대적 차 문화 공간’으로 재해석한다.
의재문화 유적과 춘설차 밭을 함께 되살려, 차와 예술이 공존하던 무등산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오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2024년 마스터플랜 수립…무등산 자연·예술·차를 잇는 공간 구상
동구는 2024년 5월 무등산의 자연과 예술, 차 문화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기본계획(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의재문화유적지와 춘설차밭 일원을 두 축으로 삼아 공간을 구성했다.
의재문화 유적지는 기존 건축물과 외부 공간을 하나의 서사적 동선으로 엮어, 방문객이 의재 허백련 선생의 예술정신과 차 문화를 단계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춘설차 밭은 전통 차밭 복원을 통해 자연경관 가치를 회복하는 동시에 의재미술관·증심사와 연계를 강화해, 이동 과정 자체가 자연·예술·차 문화를 함께 경험하는 여정이 되도록 했다.
특히 야간에는 조명과 미디어 연출을 더해 낮과는 다른 분위기의 몰입형 야간 예술 경험을 제공할 계획이다.
문향정은 농업학교 시절 축사로 쓰이던 건물을 정비한 복합 공간으로, 역사적 흔적을 살리면서 의재의 예술 세계와 차 문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카페, 소규모 전시, 지역 차·문화상품 판매 기능을 한데 모은 체류형 거점으로 조성된다.
방문객은 이곳에서 차와 휴식을 즐기며 자연스럽게 의재의 작품과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춘설차공방은 의재가 차를 만들던 공간을 정비해 물레방아를 보전·활용하고, 전통 제다 과정 전시와 계절별 차 만들기 체험·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춘설차의 역사와 문화를 생생히 전달한다.
관풍대는 과거 손님을 맞아 차를 대접하던 사랑방 겸 다실을 재해석한 공간으로, 차 명상과 사색, 소규모 차담·응접이 가능한 무등산 인문·정신문화의 상징 공간으로 조성되며, 자연을 바라보며 차를 매개로 휴식과 교류가 이뤄지는 의재문화유적지의 정신적 중심축 역할을 하게 된다.
의재문화유적지의 진입 교량인 문향교는 일상에서 예술 공간으로 넘어가는 ‘전이’를 상징하는 파빌리온형 구조로 조성돼, 다리를 건너는 동안 자연을 조망하며 서서히 의재의 세계로 진입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관풍대 뒤편 숲속 쉼터와 기존 건축물·춘설헌·춘설차밭을 잇는 보행 동선·조경 계획을 통해 무등산의 지형과 식생을 최대한 살린 자연 친화적 환경도 조성할 예정이다.
춘설차 밭 복원은 우리나라 근대 차 재배의 출발점이자 의재가 차 문화를 실천했던 장소의 역사성을 되살리는 작업으로, 역사 기록과 전통 재배 방식을 반영한 단계적 복원과 의재문화유적지와 연결되는 산책 동선을 통해 차·예술·사유를 함께 경험하는 열린 문화경관으로 재구성된다.
방문객은 복원된 차밭을 거닐며 무등산의 자연과 의재의 예술정신, 차 문화의 깊이를 함께 체감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동구는 의재문화유적지 복원의 상징성과 공공성을 고려해 동구 최초로 ‘지명설계’ 방식의 설계공모를 진행하고, 국내 대표급 건축가 6인을 초청해 자연환경 보존과 문화유산 해석을 공통 과제로 한 다양한 안을 검토했다.
지난해 11월 심사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등으로 잘 알려진 최욱 건축가의 작품이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이 당선작은 의재의 예술정신과 무등산 자연을 절제된 공간 언어로 구현하면서도 유적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현대적 활용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를 통해 의재문화유적지 일대가 역사성과 상징성을 유지하면서 오늘의 관람객이 체험하고 머무를 수 있는 현대적 예술·관광 공간으로 재탄생할 기반을 갖추게 됐다.
●예술과 자연이 어우러진 새로운 무등산 관광지로의 도약
동구는 이번 사업을 통해 오는 2027년까지 무등산 의재문화유적 일대를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관광 거점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단계별 정비와 콘텐츠 고도화를 통해 계절과 시간대별로 차별화된 관광 경험을 제공하고, 인근 문화·관광 자원과의 연계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간다.
이러한 가능성은 이미 시범 사업을 통해 확인됐다.
동구는 체험·전시 프로그램 ‘우리 하늘만큼 땅만큼’을 운영해 약 5천여 명의 어린이와 가족 단위 방문객을 유치하며, 자연과 예술을 결합한 체험형 콘텐츠가 실제 관광 수요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입증했다.
동구는 올해부터 의재문화 유적지와 춘설차 밭 일원에 대한 정비 공사에 본격 착수해 노후화된 시설을 개선하고 관람 동선과 경관을 정비하는 등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는 기반 조성에 주력할 예정이다.
이를 바탕으로 2027년부터는 ‘의재정원 한바퀴’, ‘올빼미 달빛기행’, ‘춘설차밭 체험’ 등 문화·예술을 접목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본격 운영하고, 인근 의재미술관과 증심사를 연계해 무등산 자락의 문화·예술·자연 자원을 하나의 예술관광 클러스터로 묶어 나갈 계획이다.
사업이 마무리되면 무등산권 체류형 예술관광 확대, 의재문화유적과 춘설차 문화의 체계적 보존·활용, 지역 경제 및 소상공인 활성화, 국립공원 내 친환경·저영향 관광 모델 제시 등 다양한 효과가 기대된다.
특히 자연경관 보전과 문화 향유를 동시에 충족하는 관광 모델을 구축함으로써, 무등산 관광의 질적 전환을 이끌 것으로 전망된다.
동구 관계자는 “의재문화 유적과 춘설차 밭은 다른 지역에서 모방할 수 없는 무등산만의 고유한 인문자산”이라면서 “자연과 역사, 예술의 맥락을 존중하며 무등산다움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예술관광 공간으로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