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행정신문 장규호 기자 | 지난달 호주·뉴질랜드에서 막을 내린 FIFA 여자 월드컵에는 한국인 심판이 5명이나 참가해 이목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오현정(35) 심판은 주심과 대기심으로 총 5경기에 배정 받으며 한국 심판의 위상을 널리 알렸다.
처음으로 여자 월드컵을 경험하고 돌아온 오현정 심판을 지난 7일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가 만났다. 오 심판은 “한 번 눈 감았다 뜨니 월드컵을 경험했고, 어느새 집에 와 있더라”며 웃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월드컵에 얼마나 집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는 지난 2019년 프랑스 대회 때도 심판으로 참가를 도전했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상심이 컸던 탓에 심판을 그만 둘까도 고민했지만 절치부심한 끝에 마침내 꿈을 이뤘다. 지난해 말,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본선 초대장을 받은 그는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오 심판은 이제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여자 심판으로서 최초로 남자 월드컵 주심을 맡은 스테파니 프라파르(프랑스)의 뒤를 따르겠다는 각오다. 프라파르는 2019년 여자 월드컵 결승전 주심으로 활약했으며, 프랑스 1부리그 리그앙에서도 심판 경력을 쌓은 끝에 남자 월드컵 주심까지 맡게 됐다.
1차 목표였던 여자 월드컵 참가를 이뤘으니 오 심판은 이제 더 큰 목표를 향한 추진력을 얻었다. 그의 말에서 차분하지만 단단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 월드컵에 다녀온 뒤 뭐하며 지냈나?
월드컵만 바라보고 쉼 없이 달려왔기에 쉬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은 시즌 중이라 들어오자마자 일을 했다. 다른 나라 심판들은 월드컵 마치면 여행도 다니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다고 하더라. 그래서 좀 부럽기도 했고, 큰 대회를 마치니 허무하기도 하고 아무튼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주어진 임무가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 막상 그토록 바랐던 월드컵을 경험해보니 어땠나?
힘들었다기보다는 그냥 하룻밤 꿈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니 월드컵을 경험했고, 어느새 집에 와 있더라(웃음).
한 달 넘게 현지에 머물면서 매일 축구만 생각했다. FIFA의 심판 훈련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경기를 준비하고, 경기를 치른 후 경기를 분석하는 일과가 이어졌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도록 스케줄이 짜여있었다. 반복적인 생활이었지만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 5명의 한국인 심판이 같이 했기에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을 것 같다.
심판 베이스캠프가 시드니에 있었는데 대회 전에는 같은 숙소에 머물며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대회 시작 이후에는 서로 만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김유정 심판은 오클랜드에 일주일 가량 머물기도 했다. 우리 팀은 경기를 배정 받으면 해당 지역에 갔다가 시드니로 다시 돌아왔다.
(오현정 주심은 이슬기, 박미숙 부심과 트리오를 이뤄 스페인 - 잠비아전에 배정됐다. 역대 남녀 월드컵을 통틀어 한국인 심판만으로 주심과 부심이 모두 구성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 이번 여자 월드컵에 한국 심판이 5명(주심 2명, 부심3명)이나 선정됐는데, 이렇게 한국 심판들이 대거 발탁된 이유는 뭐라고 보는가?
4년 동안 준비하면서 대한축구협회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함께 여자 심판들이 적극적인 도전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줬다. 이전에는 남자 경기에 여자 심판이 투입되는 것에 대한 걱정 어린 시선이 있었는데 과감하게 개방을 했다. 남자 체력테스트를 통과하고, 자격이 되면 여자 심판을 남자 경기에 투입했다. FIFA도 여자 심판들이 남자 리그에 도전할 것을 권유했고, 협회도 이점을 인지해 서포트해줘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본다.
이젠 단순히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은 인원이 가더라도 더 큰 무대를 경험하고, 중요한 경기에 배정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판과 협회가 다같이 노력해야 한다.
- 지난 남자 U-20 월드컵에 이어 이번 여자 월드컵에서도 VAR 판독 후에 주심이 마이크로 판독 결과를 관중들에게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이 방침에 대한 효과나 심판들의 반응은?
대회 전에 이 점을 인지했고, 염두에 뒀다. 현지 세미나에서는 디테일한 요구를 했다. 이전 대회는 단순히 최종 결과를 말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판정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길 원했다.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FIFA 심판위원장은 판정 과정에 대한 설명을 중요시했다. 그런 과정이 없이 최종 결과만 발표하면 관중들은 최종 결과에만 집중하고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심판들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운 점도 있었다. 리허설할 때도 보면 영어를 잘하는 심판들도 막상 하려니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고 하더라. 그래도 대회 초반에 비해 후반에는 심판들도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정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팬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좋다고 생각한다.
- 처음 주심으로 배정됐던 스페인 - 잠비아전에서 VAR 판독 결과를 마이크로 말하면서 잠깐 실수(원래 ‘노 오프사이드-골’로 발표해야 하는데 ‘노 골’로 말했다가 추후 정정)를 했는데, 너무 긴장해서 그랬던 건가?
이전 상황에서 부상 선수가 있었다. 선수의 치료를 기다리면서 어떻게 경기를 재개할까 생각 중이었다. 또한 (오프사이드 판정을 잘못 내린) 1부심 (이)슬기 언니가 의기소침할 수 있는데 어떻게 잘 이끌고 운영할지도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최종 결과를 발표하는데 그냥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말을 하다 실수했다. 이후 다시 골로 정정하긴 했다. 그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또 벌어졌는데 그때는 정신이 번쩍 들더라.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발표에만 온 신경을 기울였다.
나중에 숙소로 돌아오니 중국 심판이 소셜 미디어(틱톡)에 올라간 해당 영상을 보여주더라. 중국 사람들이 그걸 재밌게 봤다고 하더라. 당시에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지금은 즐거운 추억이 됐다.
- 첫 월드컵 출전인데도 불구하고 주심 2경기(조별리그 스페인 – 잠비아, 아이티 – 덴마크)와 대기심 3경기(조별리그 잉글랜드-덴마크, 16강 네덜란드 – 남아공, 8강 잉글랜드 - 콜롬비아)에 배정됐다. 꽤 많이 배정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FIFA의 평가가 좋았던 것 같다.
경기 후 평가관이 각 경기에서 어려운 장면이나 배워야 할 점을 골라 공유한다. 그리고 팀별로 개인 평가관이 피드백을 해준다. 조별리그 두 경기에 주심으로 들어갔는데 경기 후 좋은 평가를 들었다. 특히 아이티 – 덴마크전은 경기 승패에 따라 토너먼트에 올라가는 팀이 결정되는 상황이었고, 경기 중에도 어려운 상황이 많았는데 경기 후 브리핑에서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16강전 대기심으로 들어가게 된 것 같다. 이후 8강전에서도 연속으로 대기심을 맡았는데 나도 의외였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주심이 서른 명 정도 되는데 보통은 16강에 배정된 심판이 8강에 연속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 함께 주심으로 처음 선발된 김유정 심판이 대기심으로는 7경기나 배정을 받았지만, 정작 주심으로는 한 경기도 배정받지 못했다. 동료로서 옆에서 지켜보기에 굉장히 안타까웠을 것 같다.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처음에는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큰 동기부여 요소가 생겼다. 다음 월드컵에 도전한다면 이번 월드컵 경험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지난 월드컵에 도전할 때 막판에 떨어졌다. 그래도 (김)유정이는 현장에서 각종 훈련과 시스템을 경험했으니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됐을 것이다.
-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도 드러나듯이 최근 여자 선수들의 신체 조건(피지컬)이 경기력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심판들도 거기에 맞춰서 신체 조건이나 피지컬 능력이 중요해질 것 같다.
확실히 속도가 빨라지고, 몸싸움도 거칠어졌다. 이번 대회 심판을 하면서 여자축구도 많이 발전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남자 경기에 투입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보면 남자 리그를 경험한 심판이 확실히 여유도 있더라. 큰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남자 리그를 뛰고 왔다는 자부심이 자신감으로 현장에서 나왔다.
- 최근 K리그1 대기심과 K리그2 주심으로도 배정되고 있는데, 힘들지 않은지.
처음 K리그2 주심을 맡을 때는 더 강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경기를 치러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하면서 운영의 묘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K리그 1,2는 VAR이 있기 때문에 선수들도 어느 정도 신뢰를 가지고 한다.
힘들다기보다 행복하다. 처음에는 너무 오고 싶었는데 이제는 K리그 소속 심판으로서 인정을 받고 싶다. 남자 리그에 여자 심판이 있다는 게 특별하지 않은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 주심을 맡았던 K리그2 경기 중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월드컵에 다녀온 후 곧바로 두 경기에 들어갔다. 한 경기는 부산과 김포의 대결이었다. (당시) 2,3위간 대결이라 쉽지 않았지만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 같다. 또 다른 경기는 안산과 천안의 대결이었는데 12,13위간 경기였다. 이런 경기가 더 힘들다. 선수들도 이기려는 의지가 강했고, 항의도 꽤 있었다. 경기를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나를 흔들어놓으려는 면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선수들과 소통하고, 강하게 할 때는 강하게 대처하면서 잘 마쳤다.
- 월드컵과 K리그 심판을 맡는 것을 비교한다면 어떨까.
확실히 판정에 대한 부담은 K리그가 더 크다. 다만 월드컵은 많은 관중 앞에서 경기를 치르니 거기서 오는 부담이 있다. 적게는 2만 명 정도에서 많게는 7만 명까지 들어온 경기도 있었다. 그래도 월드컵을 오랜 기간 동안 준비했고, 잘 준비했기에 후회 없이 즐기다 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K리그에서도 실력을 증명하고 싶다,
- 다음 여자 월드컵에도 또다시 도전할 것인가?
그렇다. 나만 열심히 한다면 문제 없을 것 같다. 이제는 단순히 참여하는 것을 떠나서 의미 있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결승 같은 큰 무대에 서고 싶다.
- 남자 월드컵에 진출한 최초의 여성심판 프라파르가 여자 월드컵 결승전 심판을 맡은 후 남자 리그 경험을 쌓으면서 남자 월드컵까지 갔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해볼 수 있는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여자 심판이 남자 월드컵에서 활약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날이 곧 올 것이다. 이미 콜리나 심판위원장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개인 능력으로 판단하겠다고 말했고,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가능성을 확인했다. 우리나라도 남녀 구분 없이 문을 열었기 때문에 경쟁력을 쌓으면 될 것이다.
-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
이번 시즌이 끝나면 잠깐이라도 쉬고 싶다. 월드컵을 위해 쉼 없이 달려왔는데 다시 힘을 내서 가려면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쉬려면 또 불안한 마음이 든다(웃음). 일단 내년에는 파리올림픽에 가고 싶다. 올림픽은 월드컵보다 참가 팀 수가 적어 더 힘들지만 도전하겠다. K리그1 주심을 맡는 것도 또다른 목표다. 실력으로 증명해 보이겠다. 더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