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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민홍규 같은 사람 여럿… 국새 말고도 터질 일 많아"

- 匠人… 가짜 경력 내세운 사기꾼들에게
- 세상물정 모르는 장인들 속는데
- 문화부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시민행정신문 편집자문 위원 | 글 / 공예 운동가 이칠용이 말하는 '한국 공예예술의 현주소' 2006년 여름 민홍규(56·전 국새제작단장)씨가 서울 중구 장교회관 지하상가에 있는 한국공예예술가협회에 들어섰다. 공예·나전칠기 책이 사방으로꽂혀 있고, 보석함·목공예 수저·펜꽂이 등 온갖 공예품이 있는 18평짜리단출한 사무실이다.

 

 

사무실 안에는 작은키(160㎝)·둥근 얼굴의 이칠용(64·한국공예예술가협회장)씨가 서류 더미와 책더미에 폭 파묻혀 있었다. 민씨가 부탁했다. "국새 보관 장식품을 만들어 줄 장인(匠人)을 찾고 있습니다. 동참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씨는 다음날 국새를 싸는 보자기·매듭·자물쇠·함 등을 만드는 장인 12명의 연락처를 정리해 민씨에게 건넸다. 이 가운데 2006년 말 민씨가 실제로 섭외한 사람은 4명. 이씨 추천으로 국새제작단으로 일했던 중요무형문화재 A씨는 "민씨가 예산이 부족하다고 해서 원래 700만원 받아야 할 것을350만원만 받았다"고 했다.


민씨와 이칠용씨는 어떤 사이기에 이런 부탁을 했을까? A씨가 말을 잇는다. "장인들은 이야기해보면 서로 통해요. 그 사람(민홍규)은 아니었어요. 원래 공예계에서 활동했던 사람이 아니죠. 어느 날갑자기 나타나 아는 사람이 없으니 마당발 이 회장을 찾아온 거예요."


3일 오후 기자 역시 이씨의 사무실로 불쑥 찾아갔다. 마침 지방무형문화재 B씨가 각종 자료를 들고와 이씨에게 '진상조사'를 의뢰하던 중. B씨는 "스승이 엉터리 기법으로 부당하게 인간문화재가 됐고, 각종 복원 사업을 도맡아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다. 이씨가 말했다. "일각에선 민홍규보다 더한사람이라고 하는데, 아직 양측 주장을 종합해보지 않았으니 다음 주 중에 충북에 있는 스승을 만나봐야겠네요."


이씨는 1970년 차린 나전칠기업체로 돈을 많이 벌었다가 1996년 부도로 그만두고, 지금은 '공예운동가'로 활동 중인 사람이다. 억울한 사연을 가진 장인들이 이씨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다. 이씨가1983년부터 각종 신문 기고란에 공예계의 문제를 지적한 원고만 해도 600편 이상. 그러니까, 이씨는 장인(匠人)의 해결사다.


육군박물관이 소장했던 보물 '금고(金鼓·전쟁시에 쳤다는 청동 징)'가 '가짜'라는 것(2008), TV홈쇼핑에서 144만원·90만5000원짜리 방짜유기세트를 팔던 무형문화재가 '사이비'였다는 것(2009), 문화재청 직원이 인간문화재에게 공갈·협박편지를 보낸 사건(2002) 등이 세상에 드러나던 이면에는 이씨가 있었다.


"민원실도 아닌데 사람들이 찾아와요. 저는 관련기관에 건의를 하거나 언론사에 제보하지요. 요주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는지 문화재청에선 14년간 '문화재 전문위원'도 시켜줬어요. 그렇다고 청에서 자문을 해온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칠용은 서울 대동상고 1학년 때, 주먹 좀 쓴다는 학생들이 모인 을지로3가 '한체(한국체육관)'에서 태권도를 배웠다. 대학생들에게 휩쓸려 데모대에 가담해 청와대 담도 넘어봤다. "담 넘어봤자 아무것도 없던데요." 그러자 1965년 집 앞으로 형사들이 찾아왔다. 형사들이 무서워, 강원도 철원의첫째 누나 집으로 도망갔다.


철원 일대에 유일한 서점 '고향서림'을 열고 1년 반 동안 운영했다. 글도 썼다. "화전민들이 비무장지대에서 탄피를 줍다 군인에게 들켜 고문·성추행을 당한 사건을 고발하는 논픽션입니다. 이름을 '이용팔'로 바꿔서 '비무장지대의 비극'이란 제목으로 월간 '야담과실화'에 보냈더니 곧 실렸어요."

 

 

'칠용'에서 '용팔'로 바꾼 어설픈 위장술은 금방 들통났고, 그는 헌병대에 끌려갔다가 바로 입대했다. "참전용사로 베트남에 있을 때, 장교들이 군용품을 몰래 고국으로 부쳤어요. 저도 시레이션(미군전투식량)·정글화·군용 담요 등을 잔뜩 보내려다 들통나서 '사병 주제에 간부들 하는 짓 한다'며죽도록 맞았지요. 그때 호되게 당한 게 인생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제대 후 이씨는 을지로 대영화보사에 기자로 취직했다. "귀국할 때 사온 캐논 카메라와 소니 녹음기가 있다"고 하자 합격시켜줬다. 그리고 첫 취재를 나간 중곡동 나전칠기 백골(白骨·옻칠을 하지 않은 뼈대가 되는 나무 그릇) 공방에서 공예품에 빠져든다.


"뽀얀 목기(木器)가 얼마나 예쁘고 신기하던지, 못질 없이 아교로만 붙이는 데 예술이에요. 한 달만에 화보사를 그만두고 중곡동 무허가 판잣집에서 일하던 장인 김평산씨를 데려와 이문동에서 '한미공예사'를 차렸습니다."


시간 나면 유명한 옻칠장이를 찾아나섰다. 산자락에서 만난 칠 채취공들은 저마다 귀한 생칠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며 겪은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씨는 장인들 사이에서만 살아 꿈틀대던 지식을 정리했다. 이씨는 나전칠기 이론과 도안을 기록한 책인 '현대공예'를 1976년에 발간했다.


1970~80년대 자개장롱은 40~50대 주부들의 꿈. 장롱이 커서 들어가지 않으면 방문을 뜯어서라도넣었고, 딸이 시집갈 땐 나전칠기 보석함을 쥐어 보냈다. 최고급 자개장롱은 1억원을 넘었다. 1970년 가정집 마당에 차렸던 한미공예사는 5년 뒤 강북구 수유동에 대지 90평 공장으로 컸고, 1982년에는 경기도 양주에 있는 대지 460평·직원 25명 대형 공장이 됐다. 이칠용은 1979년부터 칠기 판돈으로 칠 장인들을 데리고 일본 유명 나전칠기 공방을 시찰하러 다녔다.


일본 메구로가조엔을 복원한 유명 옻칠작가 전용복씨도 그중 한 명. 이씨가 지갑과 책꽂이 사이에 끼워둔 어음을 자랑처럼꺼냈다. 낡아 바스러질 것 같은 500만~1000만원짜리 어음들이 튀어나왔다. "장인들이 힘들다고하면 많이 빌려줬는데 지금 와서 받아봐야 어쩌겠습니까. '업자'인 저도 몇 번씩이나 속아봤어요."


한미공예사는 1990년 이후 기울었다. 이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선거운동을 두 번이나 뛰었다"고 했다. 문화산업진흥기본법에 '공예'분야를 집어넣겠다는 모호한목표 때문이었다. 내심 '공예인들에게 한 자리라도 주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다.


"당선"당선 이후 연락이 끊기기도 하고…. 한 비서관이 '다른 분야는 대통령께 드릴 선물도 준비하는데공예분야는 왜 그러느냐'고 해서 8명이 2000만원짜리 서류함, 펜꽂이, 은공예품을 세 보따리씩 갖다 준 적도 있어요. 이후 연락이 끊겼어요. 속았다 싶어 영부인에게 편지를 보냈더니, 비서관이 화를내며 나타났어요. 한바탕 싸우고 물건을 돌려받았지요. 고스란히 자기가 갖고 있던데, 서류함은 아직도 못 찾았어요."


"바닥에서 고생하지 말고 대학에 와서 크게 놀라"고 제안한 사립대 교수도 있었다. 그는 한 대학 정보관에 비장한 각오로 들어갔다가 10개월 만에 다시 철수했다. "정치인·교수들 말에 기대한 제가너무 한심했어요."


이씨는 "난 학벌도 없고, 인맥도 없이 좌충우돌하는데 날 찾아오는 '억울한 장인'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고 했다. "정부기관에선 전문성 없는 자료를 내요. 가짜 경력으로 전수비를 한탕 하려는 '사기꾼'도 많아요. 나전 칠기·방짜유기만 해도 절대 한 명이 만들 수 없어요. 5~6명의 합동 작품으로 탄생하는데 문화재는 스승 한 명에게만 줘요. 그 밑에 있던 제자나, 하도급받아 일했던 장인들이 나와스승과 싸우는 일도 생깁니다. 잘 안 팔리는 공예품 장인은 정치판이나 지자체에 기웃거려보다가실망해요. 이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계속 절 찾아왔어요. 앞으로도 제2의 민홍규도 나올 수 있어요. '범종' 분야에도 최근 다툼이 생겼죠."


8일 오전, 이씨는 '전용복 귀국 축하' 문구를 새긴 협회 기념수건 두 장을 챙겨 경기 양수리 두물머리강가와 남양주의 한 비닐하우스를 찾았다. 두물머리에는 국내 유일의 '조선장' 김귀성(59·경기도무형문화재)씨가 배에 옻칠을 하고 있었다. 2대째 전통 한선(韓船)을 만드는 김씨는 2년 전부터 조달청의 전통 한선 제작 공개입찰에 한 차례를 제외하곤 번번이 떨어지고 있다. 공업용 배 만드는 업체보다 '실적'이 떨어지기 때문. "전 찍어내듯 배를 만들지 않아요. 나무도 낭창낭창하게 휜 낙엽송을 3년씩 말려 쓰는데…." 남양주에 사는 또 다른 장인 장경춘(70)씨는 이씨를 만나자 울기 시작했다. 그는 백골을 만든다.

 

일주일 전 태풍 때문에 장씨가 세든 비닐하우스 한 동이 두 번이나 무너졌다. "4년 동안 제 일생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어온 서랍장 4개가 망가질까 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이 서랍장을 처음 만들 땐 대패질도 쉽게 했는데, 이제는 몸도 잘 지쳐요." 장씨의 서랍장은 이웃의 배려로 소농가창고에 임시 대피시켰다. 이씨가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그래도 희망을 갖고 해야지." 이씨는 "4년 전 이천 에 있는 민홍규씨 공방에 갔을 땐 가마에 불 땐 흔적이 없어서 이상했었다"며"진짜 장인들은 이런 곳에 숨어 있다"고 했다. "나중에 책을 쓰면 이름을 이렇게 짓겠다고 말하니까다들 말려요. '불러도 대답없는 문화부 장관이여!'" 탄탄한 흑단나무로 짠 화려한 서랍장 너머로 얼룩소가 음매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