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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성 작가 잠들었던 동심을 화폭에 옮겨 깨우다.

- 인사아트 프라자 갤러리 1층
- 5월 29일~6월 4일까지 열린다.

시민행정신문 장규호 기자 | 어느 깊은 숲속의 녹색 소파에 피노키오가 앉아 있다. 무슨 생각에 그리도 골몰하고 있을까.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먼 곳의 하늘을 응시 중이다. 아무래도 기분 좋은 옛 기억이라도 떠올리는 중인가 보다. 건너편 숲속에 고개만 내민 측음기 스피커에선 부드러운 선율이 끊이지 않은 듯. 온 숲엔 청명한 기운이 가득하다.

 

 

피노키오의 모습은 어른인 듯. 아이인 듯 경계로 보인다. 날기엔 아직 부족한 여린 날개로 무한한 상상의 망중한을 즐긴다. 그의 들뜬 마음을 전해주는 전령사는 바로 잉꼬 커플이다. 건강한 잉꼬는 놀이에 관심이 많고 사교적이라 했듯, 소파와 맞은편 수풀에 앉은 둘의 대화가 미루어 짐작된다. 분명 피노키오 속마음의 잔잔한 감동과 설렘의 여운을 전해주고 있지 싶다. 먹음직한 과일엔 손도 대지 않을뿐더러, 그 옆의 쿠션 마차그림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속마음이 엿보인다.

 

 

저 멀리 하늘 중앙엔 피노키오의 꿈이 펼쳐지고 있다.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편 건강한 백마는 피노키오를 대신해 태양에라도 다다를 기세다. 상상 속에선 그 누구도 어느 무엇도 도리 수 있다. 여념 없이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지금의 피노키오처럼 자신의 이데아를 만나게 된다. 자연의 숲속을 배경으로 피노키오나 어린왕자, 날개 달린 흰말 혹은 얼룩말, 멀리 보이는 산이나 성(城), 가방, 비행기 등은 황제성 그림의 시그니처 모티브들이다.

 

 

황제성 작가가 그림 속에 등장시킨 소재들의 공통점은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해준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면 동심(童心)은 사라진다고 믿는다. 적어도 껍질을 벗듯 젼혀 다른 서인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교육받는다. 하지만 그 어린 시절의 동심은 잠들었을 뿐이다. 황 작가는 그곳으로 다시 가고 싶은 ‘어른이’의 꿈과 이데아를 화폭에 옮겨 깨운다. 필름영화의 한 장면을 끊어낸 듯, 너무나 극사실적이고 초현실적이어서 깊이 빠져들게 한다. 

 

 

“초기부터 한동안의 작품 주제는 ‘생명의 순환’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도양철학적인 측면에서 ‘윤회사상’과도 통했죠. 그렇다고 사후세계를 동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현세에 주목했어요. 그러다가 점차 지금 세상과 맞닿은 또 다른 ‘다차원의 세계’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어른 동화’ 시리즈의 시작입니다. 마치 유년기와 성연기가 한데 어우러진 관점을 ‘어린왕자(피노키오)의 동심’으로 보여주려 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담아 놓았던 유년기의 소중한 추억들을 연상시킬 소재를 자주 등장시키곤 합니다. 결국 마음에 간직했던 미래에 대한 꿈의 이데아를 찾아 떠나는 노마드(nomad)의 표현인 셈이죠.”

 

 

황 작가는 ‘꿈을 그리는 작가’다.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무 인형 피노키오의 희망처럼, 현실을 탈피해 순수했던 동심을 되찾고 싶은 우리의 숨겨진 자화상을 비추고 있다. 작가적 상상력의 끝은 경계가 없다. 자신보다 몇 배 더 거대한 페가수스(pegasus)와 마주 선 피노키오는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를까. 그 천마(天馬)가 들려주는 그동안의 수많은 경험담은 고스란히 자신이 맞게 될 미래가 될 것으로 믿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피노키오 옆에 놓인 빨간색 경비행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어린왕자의 애마였기 때문이다. 그 빨간 비행기에 올라탄 피노키오, 상상만 해도 너무나 설레고 흥미롭다.

 

 

황 작가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현실이 아닌 동화 속에 초대된 것처럼 색다른 상상력에 젖어든다. 다소 극적인 연출 효과도 경험하게 된다. 한순간 갑작스럽게 장면이 바뀌어 어느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 속에 떨어진 느낌이다. 온갖 사물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실재감이 놀랍다. 물론 황 작가의 붓끝에서 태어난 장면들이다. 마치 섬세하게 프린트한 것처럼 세미라고 정교한 구성력과 완성도에 두 번 놀라게 된다. 

 

 

이처럼 사실적 구상화법으로 이끌어낸 초현실적인 장면의 그림들을 흔히 ‘데페이즈망 (dépaysement)’ 기법이라고 부른다. 본래 프랑스어로 ‘나라나 정든 고장을 떠나는 것’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일상적으로 친숙한 질서나 배경(분위기)에서 떼어내 그 사물의 속성과 전혀 무관한 장소를 마주했을 때의 생경함을 활용한 조형성이다. 그러한 이질적인 상황으로의 심리적인 충격은 묘한 감흥과 여운을 자아낸다. 상상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데페이즈망 기법을 잘 구사한 작가중엔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가 대표적이다. 낮이면서 밤인 풍경, 하늘의 구름이 컵 속에 담겼다거나 하나처럼 어우러진 두세 가지 환영을 한 화면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마그리트마의 신묘한 조형어법이다. 황제성 역시 그만의 이야기 구성으로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완형해낸다. 간혹 마그리트의 어법을 소환하기도 한다. 가령 빨간 비행기에 올라선 어린 왕자와 여우가 등장하는 그림을 보면 그가 마그리트를 얼마나 흠모하는 잘 알 수 있다.

 

 

우선 비행기 위의 어린왕자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토록 연모하던 빨간 장미가 자신을 떠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토록 연민하던 장미가 자신을 찾아오는 중일 수도 있다. 그 장미를 데려온 것은 바로 마그리트의 중절모다. 저 멀리로는 하늘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엔 밤하늘이 펼쳐졌다. 온갖 꽃이 만발한 앞쪽과 달리, 원경(遠景)속 풍경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이 끝없다. 이처럼 두세 가지 시점과 관점의 스토리텔링은 전형적인 데페이즈망 화법이다.

 

 

꿈꾸는 듯 몽환적인 풍경과 색감. 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재의 하모니,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싱싱한 생명력…. 황 작가 그림의 특징을 다양한 측면에서 나열할 수 있겠지만, 가장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는 공간의 활용법이다. 얼핏 봐선 너무나 정교한 붓질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답답할 법도 하다. 그렇지만 오히려 가슴속까지 후련해질 것 같은 시원함이 먼저 와닿는다. 문인화의 여백처럼 공감의 비움을 과감하게 구사했기 때문이다.

 

 

주로 근경은 초정밀 세필(細筆)로 정교함을 자랑하지만. 멀리 원경은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평붓을 활용했다. 좌우로는 꽉 채우면서도 앞뒤로는 최대한 공간감과 깊이를 살렸다. 아주 지혜로운 화면구성법이다.

 

 

초창기부터 이어오는 ‘생명의 순환’시리즈나 최근 ‘지금 사는 세상에서 만나는 또 다른 세상’이 관통하는 공약수는 ‘노마드 이데아(nomad idea)'의 구현이다. 늘 상상 속에서만 좇을 수 있는 이상향이지만, 그 상상만으로도 지친 일상이 조금은 치유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잠시나마 잃었던 순수한 동심을 되찮은 미소는 그 어느 것과도 값을 견줄 수 없다. 그의 이데아는 우리 삶을 존재시키는 것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