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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칠장金胎漆匠, 김정중金丁中을 말한다.

- "찜질방에 왜 가? 옻칠방에 앉아 있으면 피곤이 싹~ 가시는데"국보·보물
- '전통의 고장' 부산 유독 공예장, ”외지에서 인정받아도 고향에선 찬밥 신세“

시민행정신문 이존영 기자 | 이칠용 본지명예회장 겸 (사)근대황실공예문화협회장 , 금태칠기란 금속(金屬) 물질에 옻칠(漆)을 하여 완성시키는 공예품으로서 주로 사찰에서 사용하는 차 도구(화로, 주전자, 찻잔 등)를 비롯하여 거멍쇠 장식이나 정첩 등에 녹을 방지하기 위해 도장(塗裝)하는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인 칠공예(漆工藝)품을 말한다.

 

 

금태칠장 김정중의 공방은 부산시 진구 초읍동 비탈길 변 남루한 주택에 자리 잡고 있다. 그의 공방 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깊은 곳이기도 하다.

 

공방 인근의 동래(東來) 옛 지명이 거칠산국(居漆山國)이며 이후 거칠산군 칠산리 칠산동(漆山洞)으로 명칭이 바뀌어 현재도 칠산동이 있으니 한반도에서 부산이야말로 곧 옻의 주산지며 옻문 화의 원류지가 아닌가 연구해 볼만하다.

 

김정중이 나전칠기의 대가요, 창작 예술가인 이성운(李成雲) 선생에게 나전칠기 기예술을 사사하 여 금태칠기를 주종 장르로 잡은 데는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 동래 지역엔 옛 가야의 무덤에서 수많은 철기 유물이 나와 박물관을 가득 채워 놓았으니 분명 옛 조상들도 철기가 녹슬지 말라고 옻을 했을 것이다'하는 막연한 생각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지금은 아예 금태칠기 전문가가 되어 국내 유일무이한 명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금태칠기는 일반 칠 공예품을 제작하는 옻도장 방법보다 더 힘들고 까다로운 비법이 있어 감히 범 접하기 어려운 기술 분야이기도 하다.

 

금태칠장 김정중은 옻에 미친 사람이다. 아니 옻칠인(漆人)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작업장 한쪽 벽면엔 20㎝길이의 옻 나무토막들이 있다. 물론 그가 마시는 물은 전부가 옻물(漆水)이다.

 

 

그런가 하면 작업할 때 깔고 앉은 방석과 밤늦게까지 작업하다 잠시 눈을 붙일 때 눕는 장판에도 옻 이 되어 있다.

 

그의 오랜 경험에 의하면 남들은 피곤하고 힘들면 사우나나 찜질방으로 가는데 자신은 그런 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옻칠방에서 방석, 장판과 늘 함께하면 피곤도 가시고 거뜬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입증하고 옻의 신비로움에 대하여 좀 더 확실하게 하고픈 방안도 이미 마련되어 있 다. 자신이 죽었을 때 시신을 부산대학병원에 기증을 하기로 서명했는데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시신을 해부하여 어느 부위가 나쁘고 좋은가를 밝혀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라 했다. 이러한데 그 를'칠인(漆人)'이라 하는 데 대하여 누가 감히 토를 달 것인가! 미쳐도 이 정도는 미쳐야 옻의 신비로움을 입증하고 대대로 전승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그의 지 론이다.
 
그의 작업장 1층엔 직접 제작한 생칠(生漆)정제기가 있다. 정제기술이 뛰어난 일본제 옻이 너무 비 싸 직접 정제기를 설계하여 설치해놓고 생칠을 구입해 자신의 용도에 알맞게 정제하여 사용하고 있 는 것이다.

 

"부산시의 전통문화 행정은 큰 폭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같은 전통문화 분야인 예능(공연, 국악, 놀 이 등) 분야는 수십 명의 무형문화재가 지정되어 있고 회관, 전수관도 있는 데 비해 공예 분야는 겨 우 3~4명만 지정해놓고 전승공예관, 전수관 시설 한 곳이 없는 데 대하여 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부산엔 오래된 사찰, 국보, 보물들이 산재한 전통의 고장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공예분야를 천시, 외 면하다 보니 장인들의 인근지역(울산, 경남·북)으로 이주를 합니다. 현실이 이러하니 삭막한 부산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전칠기의 경우만 해도 이미 오래전 '동래패총'유물이 있는 걸로 보아 나전(자개)의 전승은 필수적 이어야 했으며 옻도 신라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막상 졸업생들이 취업할 칠기 산업체가 전무 한 실정이니 아까운 인재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로지 외길을 걸어온 몇몇 나전장, 칠장들 이 모여 만든 부산나전칠기 보존회가 유일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일본 동경 아서원 복원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일본은 물론 국내에까지 널리 알려진 칠예인 전용복(全龍福)도 부산 사람인데 현 재는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등의 사례에서도 보듯 부산시의 전통문화 행정의 무관심 으로 풍전등화의 기로에 있습니다.

 

 

얼마 전 부산시의회에서 김길용(金吉用) 교육위원회 위원장께 서 발언을 통해 부산의 전통공예 실상을 하나하나 사례를 들어가며 지적해 주셔서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의 말은 틀림이 없다. 맞는 말이다.

 

필자가 2010년 부산에 가서 현지 조사한 결과 부산지방엔 불화, 단청, 목조각, 소목, 석공, 불교 장 엄물(닫집, 윤장대 등) 도자기, 자수, 매듭, 연날리기, 조각보 등등 수십 년 경력의 장인들이 활동하 고 있으나 거의가 실의에 빠져 있었으며 특히 한복(침선) 장인들은 광복동 시장을 중심으로 수십 명 이 있어 일본, 중국관광객들은 물론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국내외 관광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기관에서는 이를 체계적으로 전승·전수·관광 상품화하는 데는 너무나 인색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 옻칠인 김정중의 하소연은 당연한 것이라고도 생각되었다.

 

 

김정중은 1951년 경남 거제시에서 목수 일을 하시던 김용주와 고우아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나 18 세 때 나전칠기계에 입문하여 40여년간 오로지 외길을 걷고 있으나 그동안 명장, 무형문화재 지정 등의 기회는 항상 그를 비켜가곤 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그동안 수많은 경력을 쌓았다. 국가 기술자격시험 출제위원, 기 능경기대회 심사위원, 심사장, 전국민예품경진대회에서 특별상, 동상 등을 수상했으며 덕수궁에서 개최된 2004년 세계박물관대회 기념특별전에 전시된 '조선왕조의 꽃 문화를 찾아서'전시회에 황 수로 조선왕조 궁중 채화전(菜花展)에 출품된 지당판(池塘板)과 방등을 주칠작업 했으며 전시회 가 성공적으로 평가받아 2005년 APEC정상회담 개최 시 부산시립박물관에서 재개최되는 데 참여 하는 행운을 갖기도 했다.

 

그의 금태칠 작품과 기능은 널리 인정되어 1990년 (사)한국나전칠기보호협회에서 중요무형문화 재 송방웅, 고(故) 심부길, 송추만, 천상원, 김덕용 등으로부터 전통나전칠기 작품 인증서를 받은 바 있으며 전국 최고의 분야별 장인들이 완성한 부산 학장동 승학사(주지 종옥 스님) 불사작업에도 동 참하여 저피공정으로 완성한 옻칠불단도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이다.

 

 

2010년 문화재청에서 주최한 이탈리아 로마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최된 '한국 나전과 옻칠 특별 전'에 초청되어 출품하는 행운을 갖기도 하는 등 그의 활발한 활동에 대해 국내외에서 크게 인정하 고 활용하는 데 비해 유독 거주지인 부산시에서만 인정하지 못하고 있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의 동생 김관중은 나전장으로 독립 공방을 차려나갔고 아들 철규(3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 전칠기 장인의 길을 걷고 있으며 순하디순하며 슬기로운 부인 윤만연은 시간 있을 때마다 칠방에 들어와 함께 작업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가족들로만 구성된 공방이다.

 

김정중의 집안은 효자 집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김정중의 모친 고우아 여사는 시아버님, 어머 님이 모두 90세가 넘게 장수하셨는데 어찌나 지극 정성으로 모셨던지 1983년 부산시민의 날에 시장상을 수상했으

 

며 뒤이어 화홍문화재축제 날 문공부장관상까지 수상한 적이 있다. 

 

김정중의 부인 윤만연도 항상 가족과 주변 어른께 공손하고 봉사하며 김정중의 수입이 적어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싫은 내색 한 번을 하지 않고 조용히 내조하고 있다는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마음이 짠 했다.